본 문: 마태복음 23장 23절 – 32절(통독범위: 요한계시록 13장 – 15장)
제 목: 고난주간 화요일, 끝까지 나를 몰라주어도 괜찮습니다.
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2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7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십자가 죽음을 3일 남겨준 시점에도 예수님의 발길은 성전에 머무르십니다. 성전을 사모하여 찾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23절).
죽기 전 부모는 자식에게 제일 중요한 것을 남기고 싶어합니다. 죽음을 목전 두신 예수님께서 남기고 싶은 유산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생명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시편 119:50)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예수님에게 오늘도 어김없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딴지를 겁니다. 매번 있었던 일이지만, 십자가 죽음을 3일 앞둔 지금은 예수님도 많이 속상할 것 같습니다.
철없는 자녀가 임종이 얼마남지 않은 부모를 향해 “아빠가 나한테 해준 게 뭡니까?,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게 뭡니까””라는 식으로 따지는 것만큼 심각해 보입니다. 이렇게 세상이 주님의 진심을 끝까지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의 입술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멈추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비아냥거림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왔는지를 질문합니다. 그리고 포도원 주인의 장남과 차남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장남은 “Yes” 만 하고 가지 않습니다. 반대로, 둘째는 “No” 대답하였지만 그후 뉘우치고 아버지의 말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지금은 No라고 반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No가 순종으로 바꾸는 역사도 일어납니다. 그 비밀을 알기에, 예수님은 세상이 자신을 비아냥거려도 말씀을 멈추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땅에서 떨어져 만물을 가꾸어내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헛되이 끝나지 않고 이땅에 주님의 뜻을 이루어냅니다.
(이사야 55:10, 11)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