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통독범위:욥기 32-34장)
제 목: 비슷한 내용이지만, 전혀 다른 영향력
욥의 최후 진술이 끝나자 세 친구들은 더 이상 어떤 변론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이 가장 연소자였던 엘리후에게는 욥의 승리처럼 보였던지 몹시 화를 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욥의 주장을 차례대로 인용하여 변론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욥기 32장에서 34장까지의 전체 내용니다.
욥의 첫 번째 주장,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거늘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것을 감시하신다(욥33:10-11)”
욥의 두 번째 주장,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부인하셨고 내가 정당함에도 거짓말쟁이라 하였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화살로 상처를 입었노라(욥35:5-6)”
위의 주장은 세 친구의 반박해도 욥이 일관되게 굽히지 않은 확신입니다. 그런데 엘리후의 변론이 시작되자, 욥이 이전과 달리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1차 변론 후 반론의 기회를 주어도 잠잠하고, 2차 변론 후에도 잠잠합니다.
범인의 눈을 가진 저로서는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의 차이점이 솔직히 보이지 않습니다. 굳이 다르다면 좀 더 논리적이고, 신학적으로 욥의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훈계한다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다른 내용을 참조하면서 엘리후의 변론이 세 친구와 다른 2가지를 발견합니다.
첫째, 엘리후는 변론의 과정에서 하나님이란 단어를 가장 많이 반복합니다. 욥은 17번, 엘리바스는 8번, 빌닷은 6번, 소발은 2번, 그리고 엘리후 19번입니다. 최대한 하나님 중심으로 사건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흔적으로 보입니다.
둘째, 세 친구들은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고 말하지만, 엘리후는 반대로 욥이 고통으로 인해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을 강조합니다.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연소자이지만, 가장 깊은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이란 단어를 가장 많이 반복하였듯,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지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란 질문이 지혜로 이끄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참된 지혜는 인생의 경험이나 학문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매 순간 예수님의 마음을 깨닫고, 그 마음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참된 지혜를 얻고 싶다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지 성경으로 인도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