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역대하 28장 16절 – 27절(통독범위: 역대하 28-30장)
제 목: 죄책감은 선한 양심이 아닙니다.
(대하 28:22, 230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자기를 친 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여 이르되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니 나도 그 신에게 제사하여 나를 돕게 하리라 하였으나 그 신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였더라”
아하스의 왕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만큼 멀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끝판 왕입니다. 20살에 왕위에 오른 그는 다윗의 길을 버리고 바알 숭배를 주도합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힌놈의 골짜기에서 아들을 불태워 죽이는 인신 제사까지 드립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보호막이 걷히면서 아람 군대의 침략으로 하루에 12만 명의 유다 군인이 사망하는 비극을 맞이합니다. 그후로도 아람의 침략이 계속되자 아하스는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과 신하들의 집에서 거둔 재물을 앗수르 디글랏빌레셀 왕에게 보내 도움이 요청합니다. 그런데 아하스를 돕기는 커녕 오히려 공격하며 배신합니다.(대하28:20, 21)
아하스는 지금 하는 일마다 족족 실패합니다. 당시 아하스가 얼마나 힘든지 성경은 “곤고”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마음이 곤고할 때 아하스는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는 어리석은 길로 선택합니다. 자기보다 강한 아람 왕들의 신을 섬기겠다며 하나님의 성전의 기구들을 무수고, 예루살렘 구석마다 우상의 제단을 쌓습니다. 나름 모태 신앙인 아하스가 어리석어도 이렇게까지 어리석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에 너무 늦었다”는 생각 때문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하스 입장이라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까요?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과거 행동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을 도저히 부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더 나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는 인간의 어떤 죄보다 큽니다. 그래서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늦지 않습니다. 인간을 영원한 실패로 몰아넣은 것은 가륫 유다와 같은 큰 죄가 아닙니다.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 죄책감입니다. 큰 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뻔뻔함이 아닙니다. 죄보다 크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입니다. 선함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해서 오늘도 주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